마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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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마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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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과 숲에 둘러싸여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포(細浦)마을

 

뒤로는 옛날 범이 자주 나타났다는 범왕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청남색 가는 개바다가 있어 그야말로 전형적인 배산임수 마을이다.
마을 앞 바닷물이 좁고 가늘게 형성된 포구를 일컬었던 토박이 지명 ‘가는 개’ 의 한자지명이 세포이다.

옛날에는 대장간, 나전칠기 공방, 옹기골, 공동우물, 공동빨래터를 비롯하여 ‘가는이 고개’의 전설과 ‘월성정씨영세불망비’ 등 마을 곳곳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묻어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단 한 평의 땅도 놀리지 않고 매실, 산딸기, 무화과 등 유실수를 비롯하여 종려나무, 팔손이, 남천 등 관상수를 길러 판매함으로써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사시사철 온 마을이 나무와 꽃과 숲에 둘러싸여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가는 이 고개’의 전설

전설의 고향에 납량특집드라마로 소개되었다.
산양읍과 미수동의 옛 미오지(美吾之)마을을 경계 짓는 고개를 「가는이 고개」(세포고개)라 일컫는다. 원래 옛 통제영과 당포만호영(唐浦萬戶營)을 잇는 육로 중간에 위치한 이 고갯길은 인가와 멀리 떨어진 외딴 산기슭의 우거진 솔 숲 사이로 통했다.
통영 땅에 방두수라는 날건달이 살고 있었는데 처와 아들 하나를 뒀으나 기생방과 투전판을 제집 드나들 듯 할 뿐 가정은 통 돌보질 않았다. 두수는 원래 부모로부터 꽤 많은 유산을 받았으나 모두 주색잡기에 날려버리고 오두막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두수의 아내는 본시가 착한 성품이라 남편의 술버릇을 탓하지 않고 지성으로 공경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손찌검을 했으며 어느 대감댁 소실로 하인과 부정한 짓을 저지르다가 들켜서 도망 온 생김새 반반한 술집 과부와 눈이 맞아 「저 여편네만 아니면 과부와 한 평생을 재미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만 눈이 뒤집혀 옆에 있던 아내를 죽이고 시체를 부엌바닥에 묻고는 그 길로 과부와 아들을 데리고 그 집을 떠나버려 오두막집은 완전히 폐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궂은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한 밤중에 술에 취한 한 청년이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이 집안에 들어섰더니 온통 피투성이가 된 여인이 “사람 좀 살려줘요” 하며 손짓하여 그만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 뒤에도 비오는 날이면 그 집에서 종종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 아무도 그 집 앞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한참 뒤 아랫마을에 사는 담 큰 한 젊은이가 그 집에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면서 비오는 날에 그 집 앞에서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젊은이는 집에 들어섰다. 여인은 남편과 술집 과부의 얘기를 모두 털어놓으면서 부엌바닥에 묻혀 있는 자신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젊은이는 소원대로 해주겠노라 약속을 했고 그 이튿날 부엌바닥에서 여인의 시체를 파낸 후 뒷산 고개 넘어 양지바른 곳을 골라 묻어줬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 고개를 지날 때면 돌을 던지고 「가는 이 잘 가시오」라 하며 지나가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고개 이름을 「가는 이 고개」라고 불러오고 있다.

월성정씨영세불망비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여 년 전, 당시 이곳 해안 어민들은 용동궁(龍洞宮)에 진상하는 과다한 공물로 인해 그 고생스러움이 여간 아니었다. 용동궁은 세자가 거하는 궁으로 세자의 몸이 아플때 보신을 위하여 진상을 명하였으나 몸이 다 나은 후에도 수탈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전복의 수탈은 극에 달했는데 도장(導掌 세금받치는 것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이 현지에 나와 턱없이 많은 수량을 나라에 바칠 것을 강요하고는 그 대부분을 빼돌려 착복한 때문이었다.
어민들은 통제영 관아에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매번 하소연했으나 왕실의 벼슬아치인지라 통제사도 어찌할 수 없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이웃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이 고장 탁성찬(卓成贊)의 아내 정씨(鄭氏)부인은 나이 70세 가까운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임금에게 고하기 위해 아들 봉익(鳳翼)을 데리고 무려 천리 길을 걸어 한양에 도착하긴 했으나 미천한 신분의 시골 할미가 임금님을 직접 알현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거리에서 걸식을 하며 그 방도를 꾀하던 중 어느 날 때마침 임금이 행차하는 길가에 엎드려 기다렸다가 긴 행렬이 지나가고 드디어 어가가 그녀의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용기를 내어 품속에 숨겨지니고 있던 꽹과리를 얼른 꺼내어 크게 울리면서 통영 고을의 해안 백성들이 과다한 전복의 진상과 더불어 도장배들의 횡포로 인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음을 임금님께 소상히 아뢰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이 고장 어민들이 다시 삶을 보전하는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그의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않기 위해 헌종4년(1838)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나붓등 이야기

나붓등, 금궤(金櫃) 그리고 비석(碑石)
추연선 옛적 우리 마을에
방배로 방질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부친이 돌아가도
반반한 묘 자리조차 쓸 수없이 가난하여
아무도 묘를 쓰지 않는 ‘나붓등’에 초라하게 흙으로 덮어 놓았다.

세월이 흐르고 변함없이
방배를 타고 방질을 하던 어느 날
그물에 걸려든 금궤를 건져 올렸다.

졸지에 부자가 된 그 사람은
‘나붓등’묘 자리가 명당이라 생각하여
부친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묘 자리를
봉분과 돌 비석을 세워 새로이 단장하고
정치망(定置網), 들망을 비롯한 어장사업으로
어장애비로 거듭나며 승승장구 해갔다.

지반이 약한 나비 꽁지부분에 세워진 비석은 세월의 무게와 함께 내려앉아
파도에 휩싸여 물속에 가라앉았다.
그때부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어장은 고기가 들지 않아 빚더미에 시달리다
그 사람은 패가망신 하여 마을을 떠났다.

지금도 나붓등에 초라한 묘 자욱이 있고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교훈을 간직한 채 비석은 마을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나붓등(나비동산/호접등) : 두 산등성이의 가운데가 잘록하게 연이어진 형세가 마치 나부(나비)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했으며, ‘호접등(胡蝶嶝)’은 한자지명이다.

색깔과 이야기가 있는 가는개 공동체문화마을 시집 ‘가는개마을의 노래’(2014)